[시사저널] 조용필의 역사적 20집 앨범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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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4-10-26 21:25:17 조회수 117
가왕이라는 말이 진짜로 의미하는 것은


(시사저널=김영대 음악 평론가)

빠르지도 그렇게 느리지도 않은, 마치 감정을 꽁꽁 숨겨놓은 것 같은 묘한 멜로디가 뚜벅뚜벅 펼쳐진다. 명징함이나 호쾌함과는 거리가 있는 초반부의 절제된 톤은 '어딜 찾아가고 있는지 / 까마득히 멀어지는 날들' 같은 말들이 담고 있는 막연함과 공허함과 음악적으로 정확히 호응하며 노래의 이야기 속으로 청자들을 차분히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조용필은 낙담과 후회의 이야기를 '놓쳐'라는 외침으로 반전시키며 곡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메시지인 '자기 긍정'의 다짐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다. 그리고 마침내 터져나오는 '믿어봐'라는 반복된 주문은 어른의 충고가 아닌 선배의 응원이다. 응원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돼'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확신의 뉘앙스와는 거리가 멀다. 정답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걸 몰라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켰지만 여전히 스스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어른 혹은 선배가 할 수 있는 응원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중요한 뮤지션 중 한 명인 조용필의 스무 번째 음반은 거창하고 화려한 자축과는 거리가 먼, 차분한 희망의 메시지로 문을 연다.


어느 날부터인가 가수 조용필에게는 '가왕'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이 마치 애초부터 한 이름이었던것처럼 따라붙는다. 많은 이가 그 말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곱씹기보다는 그 말이 주는 위엄 같은 것을 떠올릴 뿐이다. 그런데 조용필의 음악을 조금 깊이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커리어를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라면 '가왕'이라는 칭호가 가지는 카리스마나 막연한 권위적 위상이 조용필이라는 뮤지션이 긴 세월 들려주고 보여줘온 음악적 본질과는 오히려 동떨어진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조용필은 시대의 아이돌이었고, 트렌디한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사운드의 장인이었고, 누구보다도 진지한 뮤지션이었지만 '거장'이나 '가왕' 같은 권위에 관심을 두고 그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힘쓴 아티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과거의 어떤 인터뷰를 읽어봐도 조용필은 스스로의 음악을 혁신적이거나 실험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가수 조용필이 10월22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마스터카드홀에서 20집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가수 조용필이 10월22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마스터카드홀에서 20집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가왕'은 단지 타이틀이 될 순 없다

음악적인 욕심과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스스로가 가진 한계와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조용필이 그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음악을 섭렵하며 스펙트럼을 넓히고, 레코딩 아티스트와 공연가로서 쉬지 않고 노력하고, 결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왕좌라는 명예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하지만 그럴 자격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스스로 그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탐험가. 20집은 그런 탐험가가 써내려간 또 다른 여정의 기록물이다.

이번 20집은 2022년부터 시작된, 'Road to 20'라고 이름붙인 싱글들의 선공개 발매를 통해 완성됐다. 준비 단계부터 수많은 곡이 수집되어 추려지고, 막판까지 수록곡들이 경쟁을 벌인 끝에 첫 공개되는 세 곡을 포함한 총 일곱 곡을 선보인 것이다. 20집이라는 상징성에 비한다면 더블앨범은커녕 열 곡도 채 되지 않는 미니앨범급 트랙 수라는 점이 낯설다. 한 아티스트의 음악사에 큰 족적으로 남게 될 이런 큰 기념 음반의 경우 한번에 전모를 공개해 파괴력을 높이는 전략을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용필은 오히려 요즘 K팝 아티스트들이 즐겨 취하는 싱글 위주의 발매 방식을 택했다. 집중력은 분산되었지만 그대신 음악은 단 한 번의 동어반복 없이 산뜻한 싱글의 모음집으로 구성되었다. 

조용필 20집 앨범 커버 사진 ⓒYPC
조용필 20집 앨범 커버 사진 ⓒYPC


사실 조용필의 커리어는 순간을 바꾸는 파격이나 실험보다는 어느 순간 뒤돌아봤을 때 새삼 놀라게 되는 발걸음들로 채워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최고의 아이돌이었고 그의 음악은 늘 너무도 대중적인 히트곡이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음악계에서 이뤄낸 진보들은 오히려 눈에 띄지 않을 때가 많기도 했다. 수많은 조용필의 장점 중 어쩌면 가장 과소 평가받은 것은 다재다능한 전방위 팝 아티스트로서의 범용성과 관용성이다. 대다수의 음악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잘하는 음악에 머물러 그 장르의 관습을 유지하고 반복하는 데 반해 조용필은 늘 다양한 변화를 모색했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다양한 장르에 대항할 수 있는 그의 음악적 센스, 그리고 평범한 곡들조차 특별하게 들릴 수 있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가 가진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20》은 이 같은 전방위적 보컬리스트 조용필의 목소리와 음악적 감수성이 무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모던한 음반으로 여겨지는 '바운스(Bounce)'에 비교해 봐도 결코 퇴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분 좋은 작품이다.

앨범의 전반적인 기조는 심플하고 직관적이면서도 드라마적인 뉘앙스가 깃든 스태디엄 친화적인 리듬 위주의 음악들이 이끌어간다. 록, 신스팝, 일렉트로 팝/록, 민속음악과 EDM의 영향까지. 이런저런 라벨을 갖다 붙이고 싶은 평론가의 본능이 새삼 발동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조용필의 음악. 곡이 가진 개별적인 장르의 방향성은 적어도 조용필의 음악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본격적인 장르 음악의 순도보다는 세련되고 대중적인 팝 사운드를 완성하는 데 평생을 바쳐온 그에게 한때는 '백화점식' 아티스트라는 비판도 따라다닌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송캠프를 비롯해 외국 작가들의 협업 시스템이 보편화된 K팝 환경에서 그는 훨씬 더 자유롭게 다양한 사운드를 적용해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10년 만에 선보인 《20》은 또 한 번 젊고 매끈하며 세련된, 어느 부분을 들어도 그냥 자연스러운 조용필식 팝 음악으로 귀결되었다. 그루브 넘치는 비트와 탄력적인 보컬과 코러스의 주고받음이 상큼하기 그지없는 《타이밍(Timing)》은 신나는 분위기 속에서 느껴지는 조용필의 보컬과 리듬감이 대단히 정교하며, 불안한 느낌을 주는 화성 진행으로 문을 열어 동양적인 선율과 헤비한 기타 사운드를 조화시키며 거대한 폭풍으로 파고를 높여가는 《왜》는 조용필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복잡함을 세련되게 뽑아낸 역작이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에 익숙했던, 밀도 높은 스튜디오 프로덕션의 극한을 보여준 그의 음반들을 기억하고 여전히 즐겨 듣는다. 가왕이 《바운스》로 젊은 세대들에게 새롭게 각인되고 커리어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던 때도 내 가슴 한편에는 《바람의 노래》나 《고독한 러너》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다. 조용필의 20집을 들으며 새삼 그런 자신이 머쓱해졌다.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조용필은 가왕이라는 영예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데 나는 멈춰서 지나온 유산들을 가리키며 그것이 가져다준 영광의 세월과 추억만을 곱씹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조용필의 20집은 여전히, 그리고 또 한 번 가장 조용필다운 음악의 결정판이다. 그 어느 때만큼 젊고 밝은 에너지로 가득한 이 앨범에서 아직도 여정을 끝내지 않고 출항하는, 아니 그 여정이 꼭 끝나야 하는 것인가를 되묻는 조용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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