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e] 조용필이 55년을 '가왕'으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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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05-20 10:03:44 조회수 126
아이즈 ize 윤준호(칼럼니스트)

사진제공=YPC, 유니버설뮤직
사진제공=YPC, 유니버설뮤직


"아직 괜찮습니다."

'가왕'(歌王) 조용필의 데뷔 55주년 공연이 열린 13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 그의 이 한 마디에 3만5000여명의 관객은 유독 크게 환호했다. '오빠부대'의 원조라 불리는 조용필이 건재해야 그를 "오빠"라 부르는 이들 역시 언제든 소녀의 마음을 간직한 그 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시간 동안 25곡을 빈틈없이 소화하는 것으로 그는 73세라는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고 웅변했다. 55년 세월 동안 LP, 카세트테이프, CD, 음원 시대를 관통하며 1위를 석권한 유일한 가수인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뻔하지만, 더 적절한 수식어를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50년 3월21일,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조용필. 중학교 동창인 배우 안성기가 '모범생'으로 기억하지만, 정작 가수가 되고 싶어 가출까지 수차례 감행하면 열혈 음악학도였다. 그런 그는 1969년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8년에 화이브 핑거스를 결성해 미8군 무대에 데뷔했다. 그의 데뷔 연도는 이 때부터 계산된다. 첫 음반인 '스테레오 힛트앨범'은 1972년 발표됐다. 타이틀곡이었던 A면 1번 트랙 '꿈을 꾸리'보다 B면 2번 트랙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주목받았고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13일, 오랜만에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른 조용필은 "하도 안 부르니까 항의하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참고로 이 앨범 B면 1번 트랙 '일하지 않으려면 사랑도 않을래'는 서슬 퍼렇던 시절, 조용필의 '금지곡 1호'였다. 이유는 그 당시 많은 금지곡이 그랬듯 '가사 저속'과 '퇴폐'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비롯해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담긴 1979년 발표 앨범은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첫 밀리언셀러로 기록됐다. 그해 그가 이끄는 밴드는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으로 이름을 바꿨고, 그에 걸맞게 조용필의 위대한 행보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듬해 그는 대중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열었고, 1982년에는 '못찾겠다 꾀꼬리'와 "기도하는∼" 신드롬을 낳은 '비련'이 수록된 앨범 발표 후 국내 가수 최초로 일본 NHK 리사이틀홀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했다. 이후에도 조용필의 이름 석 자 앞에는 '단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즐비했다. 1994년에는 국내 최초로 음반 누적 판매량 1000만 장을 돌파했고, 1999년에는 대중가수 최초로 콧대 높던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펼쳤다. 2005년에는 평양에서 단독 공연으로 남북 평화의 가교를 놓았다.

조용필이라는 존재는 시쳇말로 '생태계 파괴'의 주체였다. 최상위 포식자로서 '친구여', '그대여', '허공', '서울 서울 서울', 'Q' 등 발표곡마다 1위를 석권했고, 라이벌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급기야 그는 1990년 '추억 속의 재회'의 6주 연속 1위(MBC '쇼 네트워크')를 끝으로 순위 프로그램 은퇴를 선언했다.  

사진제공=YPC, 유니버설뮤직
사진제공=YPC, 유니버설뮤직


그리고 23년이 흐른 2013년, 다시금 순위 차트에 조용필의 이름이 등장했다. 19집 선공개곡 '바운스'(Bounce)가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했고, KBS 2TV '뮤직뱅크'에서 로이킴의 '봄봄봄'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아들뻘 되는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정상을 밟은 그는 당시 "제가 20여년 전에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차트에 올라갔다고 하니 '나와의 약속을 깨야 되네' 하면서 속으로는 좋고 그래요"라고 솔직한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조용필은 팬덤이 스타를 지탱하는 K-팝 시장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오빠부대'라는 표현으로 기사를 검색(과거순) 하면 연예계보다는 체육계 기사가 먼저 눈에 띈다. 실력 있는 스포츠 선수들을 좇던 '오빠부대'라는 표현이 처음 연예 관련 기사에 처음 등장한 건 1995년 3월16일 게재된 연합뉴스 기사 속 '불멸의 스타 조용필은 최초로 오빠부대를 동원한 대형가수'라는 문장에서다. 조용필 이전에 남진·나훈아를 좇던 여성팬덤이 있었지만 '오빠부대'라는 구체적인 표현은 조용필을 통해 일반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오빠부대는 이제 BTS의 아미, 블랙핑크의 블링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숱한 히트곡과 함께 조용필을 '조용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색이다. 특유의 들썩이는 어깨로 카랑카랑하고 깨끗하게 뽑아내는 고음은 독보적이다. 이런 특색 때문에 유독 후배들이 조용필 모창에 자주 도전한다. 이런 창법의 뿌리는 어디일까?  놀랍게도 판소리와 민요다. 과거 TBC 다큐멘터리에서 낙동강에 띄운 나룻배를 탄 채 소복 입고 '한오백년'을 부르는 여성을 본 후 충격을 받아 이 노래가 담긴 앨범을 모조리 섭렵했다. 이후 다양한 판소리를 접했고 조상현 명창도 따라다녔다. "정식으로 배운 건 아니고 흉내냈다"고 하지만 타고난 미성에 판소리를 기반으로 탄 탁성까지 더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탄탄해졌다. 

조용필은 55년째 한결같은 음색을 유지하되, 음악적 장르 만큼은 머물기를 거부했다. 1970∼80년대 트로트 시대에 그는 트로트에 저항했고, 2013년 발표한 정규 19집에 담긴 '바운스'는 어쿠스틱 피아노에 전자음을 결합시켜 팝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또 다른 곡 '헬로'에는 랩이 포함되고 그의 목소리에 오토튠(auto-tune·음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프로그램)을 입혔다. 

지난해에는 9년 만에 신곡을 선보이며 더 트렌디해졌다. '로드 투 20-프렐류드 1(Road to 20-Prelude 1)'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정규 20집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싱글을 선공개하며 정규 앨범으로 향하는 서사를 쌓아나간다. 최근 K-팝 그룹들의 앨범 발표 공식이다. 해외 뮤지션들이 참여한 송캠프를 통해 요즘 음악을 적극 섭렵하며 현대적 감각을 유지했다. 이렇듯 73세 조용필은 과거에 기대 살지 않는다. 최신곡 '필링 오브 유'는 신스팝, '라'는 프로그레시브 하우스 장르다. 기존 조용필의 팬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MZ세대들에게는 조용필에 입문하는 교두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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