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기사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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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6-11 01:13:35 조회수 6096
조용필 심벌마크 만들어 赤綠黃 3색으로 디자인 1981년 07월 미국순회공연을 끝내고 19일 귀국한 조용필이 국내가수로선 최초로 심벌마크를 만들었다. 빨강 초록 노랑의 3색으로 된 이 마크는 홍익대 나성남 교수가 직접 디자인은 한 것. 외국의 유명가수들은 선전을 겸한 수익사업용으로 독창적인 심벌 마크를 제정하고 있는데 조용 필은 28일 제주도에서 녹화하는 KTV '100분쇼-조용필 비치페스티벌'을 기점으로 T 셔츠 프로마 이드등에 마크를 사용한다. 조용필, TV출연 사절 창작.연습할 시간 없어 1981-03-24 경향신문 조용필이 돌연 TV 출연을 사절해서 화재. 그는 「금주부터 앞으로 수개월 동안은 일체 TV프로그 램에 출연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 그가 내세운 출연사절 첫째 이유는 연속적인 출연 스케줄 때문에 창작이나 연습의 시간적인 여 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밀리언 셀러인 「창밖의 여자」에 이은 제2집 앨범 「촛불」 이 시간에 쫓겨 제대로 제작되지 못했다는 불평을 스스로 해왔었다. 「창밖의 여자」에 서 「한오백년」「대전블루스」등 4-5곡이 연속 히트한데 비해 「촛불」은 다만 타이틀 곡으로 그치고만 이유가 「시간의 부족」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사실 그는 지난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1개월에 걸쳐 15회 이상 TV출연을 했다. 평균 2일 1 회의 출연인 셈이고 나머지 하루도 방송국에서의 리허설이나 거기에 관계되는 일에 묶였었다고 그는 털어놨다. 둘째 이유로 너무 잦은 TV출연으로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어졌다는 입장을 밝혔다. 똑같은 노 래 똑같은 제스처에 기껏해야 의상이나 조명을 바꾸는 정도의 변화로는 「팬들에게 신상밖에 더 줄 것이 무엇 있느냐」고 그는 반문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래 4년만인 지난 80년에 컴 백해서 그는 단숨에 파죽지세로 인기정상을 공략했다. 그러나 인기의 유지를 위해서는 과도 노 출이 금물이라는 상식을 뒤늦게 나마 깨달은 것같다. 「4월 12일과 18일에 서울과 대구에서 신체장애자를 위한 자선 공연이 있기 때문에 다소 차질이 생길 것 같습니다만 만족할 만한 신곡의 작곡과 취입이 끝날 때까지는 방송국은 물론 서울에서 도 떠날 생각입니다」 조군의 말. 그의 결의는 무척 단호해 보였다. 그는 TV출연 사절기간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걸릴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통상 가수들에게 있어서 신보의 취임이 2-3개월은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군의 TV 출연은 빨라도 7월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조용필 숨겨둔 애인 있다네 1981-01-09 경향신문 톱싱어 조용필군(32)이 오는 2월 약혼을 한다. 약혼자는 한양대 무용과 출신으로 한때 충남 신 풍중고 무용교사를 지냈던 박지숙양(25). 조군이 박양을 만난 것은 75년 그의 무명가수 시절. 그가 그룹사운드의 멤버로 모호텔 나이트클 럽에 출연할때 친구들과 함께 대학 1학년생으로 이곳에 놀러온 박양을 보고 조군편에서 프로포 즈를 해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박지숙양은 10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찬씨의 3녀로 작년 10월 부모들로부터 조군과의 결혼승낙을 받았고 올해안으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최고 인기가수 조용필, 80 MBC 10대가수 가요제서 1981-01-05 경향신문 지난해 12월31일 하오9시 부터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80 MBC 10대가수 가요제」에서 조용필군 (31)이 「최고 인기가수」로 뽑혔다. 지난해로 15회를 맞은 이 가요제에서는 송창식, 박경애, 윤수일, 윤시내, 전영록, 이은하, 현 숙, 최헌, 혜은이양 등이 경연을 벌였다. 「창밖의 여자」「단발머리」등의 히트송을 불렀던 조군은 36만9천1백6통의 청취자 인기엽서와 현장 투표로 「최고 인기가수」가 됐으며 부상으로 1백12.5g의 순금 장식이 붙은 「가수왕」 트 로피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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