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기사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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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6-11 01:16:15 조회수 8166
조용필 내년에 美 순회공연 日 공연서 자신감 "국제무대서 실력 확인하겠다" 1984년 12월 13일 중앙일보 가수 조용필이 내년에 한국가수로선 처음으로 미국순회 공연에 나선다. 趙군은 내년 9월 6, 7일 하와이의 MBC 체육관을 시작으로 뉴욕-워싱턴-LA-샌프란시스코-시애틀- 토론토 등 미국 6개 도시와 캐나다의 토론토를 20여일 동안 돌며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현재 일본 16개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있는 趙군은 동경공연을 끝낸 12일 밤 이같은 사실을 기자회견 (국내)을 통해 처음 발표하면서 이는 그동안 일본 순회공연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에 추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같은 계획이 그의 일본 공연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연애 프러덕션 "교오또-도오꾜"측과 이미 합의해 정확한 스케줄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히고 이밖에도 7, 8월께 대만, 홍콩, 방콕 등 동남아 순회공연과 유럽 순회공연까지도 함께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레퍼토리도 히트곡에 로크, 팝 섞어 趙군은 내년의 미국공연에서 재미 동포들만 겨냥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미국인들에게 그의 「모 든것」을 공개해 국제 무대에서의 그의 위치와 실력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레퍼토 리도 폭을 넓혀 그의 히트곡 외에 미국인들에게 맞도록 로크와 팝뮤직을 30%가량 포함할 예정이 며 연주팀도 미국뮤지션 20여명으로 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국순회공연의 시발점인 하와이의 MBC 홀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마지막 공연을 한곳으로 널리 알려진 체육관으로 2만명 정도가 입장할 수 있는 거대한 공연장이다. 趙군의 이같은 시도는 한국가수가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본격적인 선을 보여 우리 대중가요의 위 치를 확인해 본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새 매니저 맞은 조용필 11월 3일~4일 디너쇼 지난 10월 10일 J.M프로덕션과 새 매니저멘트 계약을 마친 조용필(34)이 제7집 신곡발표무대를 겸한 디너쇼를 갖는다. 약2개월 동안 직접 스케줄을 짜는 둥 혼자 일해왔던 그는 자신의 손위동 서이자 연예사업가로 활동해 온 김종민(42)씨와 손잡음며 첫 무대를 펼치게 된 것. 11월 3일과 4일 저녁 6시 30뷴부터 2시간동안 호텔 신라 다 이내스티 홀에서 갖게 될 이번 무대 에서 조용필은 트로트, 팝, 록등 자신의 히트곡을 비롯해 현제 준비중인 신곡등 23곡을 부를 예 정이다. 또, 조용필과 음악그룹 '위대한 탄생'이 단독 콘서트 형태로 진행된다. 특히 이번 디너쇼에 대비해, 기존의 '위대한 탄생' 멤버 7명에 4명을 보강, 11명의 호화 밴드를 선보이게 된다. 특별 MC로 이덕화가 출연해 두사람의 우정을 과시할 예정이다. "못 잡겠다, 조용필" 프리 조용필에 메니져들 '정중동' 열전 조용필은 혼자하겠다는데 주위에서는, 바쁜 스케줄 관계로 힘들것이라며 조용필이 메니지 먼트 를 의뢰할 경우 과연 누가 맡게되느냐며 관계자들은 눈치작전 중이다. 음악세계 84년 10월號 78년부터 지난 6년간 해선 기획(사장 유재학)과 손잡고 일해온 조용필이 '혼자 일하겠다'고 선 언한 것은 9월 7일. 조용필의 스케쥴, 인기 관리, 출연 활동 등을 전담했던 유재학 사장이 건강 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요양중이어서 함께 일할 여건이 아니라는 것. 지난 3월에도 유재학이 입 원한 적이 있고, 작년 11월에는 조용필이 삼호 프로덕션으로 옮겼다가 다시 해선으로 돌아온 적 이 있으나 이번에는 해선과 다시 일하게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이 중론. 조용필은 결별 이후에 새 출발의 의미로 승용차를 그라나다에서 벤츠(서울 0가 4266)로 바꾸고 국내·국외 계획을 차질없이 진행시키고 있다. 11초 잠실 야구장에서의 리사이틀, 11월 16일부 터 전일본 순회 공연, 12월 12일 일본 부도칸 공연, 12월 20일 홍콩 야구장 공연등 차근 차근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매니저들은 조용필이 부른 '정의 마음'이 이미 연 5주째 각 차트에 1위로 올랐고 바쁜 해외 스케쥴 등 도저히 혼자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 '누군가가 결국은 조용필의 매니 지먼트를 하게 될 것이 아닌가'하고 조심스럽게 매니저 서로의 의사를 타진. 현재로서는 당사자 조용필이나 매니저들도 '얘기할 건수가 되지 않는다'며 현 위치가 유지될 것이라고 한 마디씩. 겉으로는 그렇게 나타나나, 조용필을 잡을 수만 있다면 마다할 매니저도 없는 데다가 서로가 누 군가가 먼저 조용필에게 접근하는가 살피느라고 조용한 가운데 열전에 돌입. 소문은 S의 C씨, J 의 K씨 등이 매니지먼트를 보게 되었느니 하고 새어나오지만 아직은 말 그대로 그냥 소문. 가요계에서는 움직을 때마다 화제가 되는 조용필이 과연 수퍼급이라면서 매니저들의 예상이 맞 아 들어갈 때, 그 전쟁 한번 볼만할 것이라며 묘한 호기심을 발휘.    日『팍스. 뮤지카 84』서 조용필 갈채받듯 우리도 日本 노래에 拍手 보낼 수 있을지… 급변하는 演藝界 안팎…意識的 대응책 세울 때 1984년 7월 19일 중앙일보 비디오 藝術을 창출한 白南準씨와의 솔직·대담한 입체 인터뷰프로도 制作, 放映했고,「마이클 잭슨」의 獨舞臺가 되다시피한 자극적 에미賞 授與實況을 해설없이 몇 차례씩이나 再放한 電波 放送母體가 지난주에는 시야를 日本으로 옮겨 『팍스 뮤지카 84』공연 녹화 테이프와 최근 日 TBS-TV 가 제작한 日本에서의 한국가요붐의 심야방송프로그램을 각각 다루었다. 하나는 現場公演場面 中 조용필의 노래만을 발췌했고, 또 하나는 해설없이 일본 TBS-TV 의 보도 프로그램을 그대로 옮겨 온 것. 가요계의 국내사정은 침체의 늪에 빠진지 오래라는데 외국에서 들어오는 연예계 안과 밖의 소식은 자극도나 심리적 영향성이 퍽 높고 짙다. 매일매일 습관처럼 그저 보고 넘기는 우리가요의 일각이 외국과의 관계를 트면서 갑자기 일상생 활권 밖으로 크게 부상한듯한 최근의 사태에는 어떤 의무적 대처가 있을 수 있을까? 그냥 우리 는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 되는 것일까? 「아시아는 하나」라는 부제로 열린 『팍스 뮤지카 84』의 다음 공연지는 서울이고 그 다음은 홍콩이란다. 일본 고오라꾸엔 공연의 경우 조용필은 우리말로, 「알란 .탐」은 중국말로 노래했 다. 공연내용이 그대로 홍콩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겠지만 서울 공연에서는 어떻게 될까? 「다니무라」는 젊고 지성적이며 열창에 속한다는 그의 노래를 그가 느낀 그대로 그의 나라 말 로 우리앞에서 부를 수 있을까? 생각나는 것은 우리의 쌓인 역사적 감정의 응어리를 우리의 「 良」과 「雅量」이 용해시킬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노래는 본시 소리를 듣는 것-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 그의 音樂性을 소리로 듣는 것이다. 英語나 이탈리아 語, 프랑스 語의 子音과 母音에는 일체 상관 않는 우리가 유독 日本語의 子音 과 母音에 銳敏하게 反應한다는 것은 어쩌면 정상이 아니다. 급변하는 演藝界의 안과 밖, 어지러운 듯 여겨지면서 오히려 언제나 소박하고 건전한 것은 대중 의 호흡이며 슬기가 아닐까. 白南準 아트를 조용히 자랑으로 여기고, 「마이클 잭슨」의 춤을 귀엽게 봐주며, 간양록의 가사 중 「어허」「어허」의 運部分에 그토록 열중한 日本 도민들의 마음의 바탕에서 우리가 感知하 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우리 노래에 진정한 拍手를 보내고 있다면 이제 우리도 서서히 그들의 노래를 받아들이 고 좋은 곡에는 拍手를 보내줄수도 있다는 것을 보일때가 아닐까. 누군가의 한구절처럼 한점 부 끄럼 없이 저푸른 하늘을 우러러보고 싶다. 『돌아와요 釜山港에』 大賞 차지 TV 東京 가라오께 大會서 1984. 6. 19 日本가수 「아쓰미· 지로」가 日本語로 부른 韓國의 대중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17일 밤 일본 TV 방송 ·TV 東京이 주최한 제 8회 日本전국 가라오께 대회에서 일본 대중가요(演歌)를 물리치고 영에의 대상을 받았다. 韓國의 인기가수 조용필도 직접 우정출연한 가운데 열린 이번 대회에는 일본 전국에서 히트한 50여곡의 한국대중가요 및 일본연가들이 참가, 이중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단연 압도적인 인기 로 대상을 차지했다. 「돌아와요 부산항」 日서 인기1위 1984-06-18 경향신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드디어 일본에서 금년도 최고 애창곡으로 선정됐다. 17일 저녁 방영된 TV동경의 「제8회 전일본가라오께 대상」이란 프로에서 당당히 그랑프리를 받았다. TV동경은 매년1회씩 전국에서 1년동안 가라오께등을 통해 유행하고있는 대중가요중에서 최고의 인기곡을 선정, 상을 주어왔다. 금년에 대상곡으로 선정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조용필이 일본공연을 통해 유행시킨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작년부터 대히트하기 시작, 일본인 가수들이 이 곡을 레코드에 취입, 시판시 킨 것만해도 30종류가 넘고있다. 그런것들을 합해 이제까지 팔린 레코드판만해도 2백만장을 넘 어서고 있다는게 이날 방송의 해설이었다. 그중에서 이날 대상을 받은것은 인기 남자 엔까가수 아쓰미 지로가 부른곡. 아쓰미의 레코드판은 6월말 현재 80만장 이상이 팔리는 히트를 했다. 물론 이 노래는 헤어진 형제를 그리는 원가사를 변조, 남녀간의 사랑을 그리는 일본적인 탈바꿈 을 하고있긴 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올들어 「연가의 고향은 한국」이라는 말이 TV에서 공공 연히 설명될 정도로 한국가요들이 유행하고 있다. 이날 TV 동경에서 소개된 곡만해도 「미워 미워 미워」「가슴아프게」「가지마오」「노란샤스 입은 사나이」등 5곡. 그외에도 이성애가 부른 「대전부르스」도 5명이상의 일본가수들이 취입 할만큼 이제「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바짝 뒤쫓는 인기곡으로 널리 불리어지고 있다. 이렇게 한국가요들이 크게 유행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설과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중에 서도 공통적인것은 오늘의 일본에 있어 한국을 알려는 붐이 대대적으로 일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 다음으로는 「연가의 아버지」라는 고가 마사오씨가 소년시절 한국에서 생활, 한국민의 애환 을 노래로 옮긴것이 엔까의 시초라는 주장. 그가 한국에서 어릴적 들은 노래들을 근거로 작곡, 유행시킨것이 오늘의 엔까 원류라는 것은 이미 거의 정설처럼 되고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것은 오늘날 일본에서 엔까의 작곡가가 자꾸 줄어가고 있어 좋은곡이 안나온다는 점이다. 조용필이 쓰는 「청춘 역마차」 타인의 수많은 억측과 오해속의 결혼 "나는 이제 어엿한 가장이다."       나는 변명을 싫어해왔다. 과오자체도 충분히 나쁜데 변명은 그과오를 합리화하거나 미화시키려 드는데 곧잘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에 대한 해명은 몇말씀 드려두는게 좋겠다. ● 침묵속의 변명 돌이켜보면 35년을 살아오는 동안에 나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뿐만아니라 인기직업에 종사한 이래 10년은 부지불식간에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기대를 배반했다. 그러나 나는 잘못 그 자 체보다 그것을 합리화 시키거나 미화 시키려는 책동은 더 나쁜 악덕으로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 에 침묵을 지켰을 지언정 나의 잘못에 대한 변명 따위는 늘어놓지 않아 왔다.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도둑 장가」란 지탄에 대해 화를 낼수도 없을만큼 기습적인 시간에 은 밀한 장소에서 예식을 치럿다. 이 사실에 대해서만은 나는 앞날을 위해서라도 약산의 설명을 달아두고 싶다. 왜 그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는가? 항간에는 내가 사생활이 복잡했기 때문에 남의 눈을 피했을것이라는 추측도 있는 모양이다. 그 러나 내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 기억할수 있듯이 지금은 어느 모로나 합법적인 나의 아내가 된 박지숙과의 약혼은 4년전이다. 우리사이에 약혼식이 있었느냐 어쨌느냐를 화제로 삼는 호사 가들도 있다지만 신문잡지에 그토록 떠들썩하게 공표된 이상의 속박력을 갖는 혼인약속이 세상 어디에 그리 흔할까? 그런 마당에 내가 또 누구에게 2중 3중의 혼인약속을 남발할수 있었겠으며, 그런 불본 듯 뻔한 정혼자가 있는마당에 나의 약속을 믿어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인기인의 결혼식이니까 초대받은 축하객외에 각계각층의 팬들이 구경거리삼아 모여들어 경 우에 딸라서는 일대 혼잡을 빚을수도 있었던 것이 나의 결혼식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이외에 나의 사생활문제로 빚어질 창피스러운 난장판이 우려돼서 비공개 결혼식을 했으리란 추 리는 사실상 황당무계한 모략일뿐이다. 내가 오랫동안 결혼문제를 매듭짓지 못하고 우왕좌왕해온 것이 오늘날 나를 매우 난감한 처지에 몰리게한 원인임에는 틀림없다. 우왕좌왕한 이유를 아내 지숙에 대한 애정이 식었기 때문이란 제3자들의 진단도 곧잘 등장했지만 그 또한 사실과 다르다. 한 남자로서 가정을 관리하는데 자신이 도무지 없는 경우-그래서 가정을 자진다는일이 부담스럽 고 두려운 경울를 상상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주저했던 것은 하는에 맹세컨대 박지숙의 남 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매우 일거리가 많은 연예인의 한사람으로서 마치 遊牧民(유목 민)이거나 한것처럼 무대 사정을 따라 東家宿西家食(동가숙서가식)을 해왔다. 나의 직업적 특성을 이해 못할 분들도 있고 "그렇게 무절제한 생활을 할 수가있느냐?"고 힐난을 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부산,대구,광주, 서울뿐 아니라 몇 달씩 해외공연도 잦고보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비정상」의 판정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처지였다. 그러한 내가 만약 가정을 가지기를 열망했다면 그 편이 오히려 큰 문제였으리라. 그렇다고 기왕에 하는 결혼식을 그처럼 변칙적으로 해야했는가? 물론 나도 보다 정중하고 조금 은 화려하게 식을 치르고 싶었고, 그 문제에 대한 내아내 지숙의 열망은 더 컸으리란 점에 추호 도 이의가 없다. 공교롭게도 아시다시피 나는 각종 보도매체의 치열한 경쟁에 휘말렸고 모든 매체를 공평하게 만 족시킬만한 擇日(택일)을 하는데 이미 2~3차례에 걸쳐 뼈아픈 실패를 거듭한 처지였다.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2월 29일 한밤중에 문득 결혼식을 결심했고, 3월 1일 돌연 한사람의 가장으로 전신을 한 것이다.    조용필, 극비 결혼식 8년 약혼녀 박지숙양과...축가, 예복없이 가족도 모르게... 1984년 주간경향 때늦게 내린 눈이 산야를 하얗게 뒤덮은 지난 3월 1일. 경기도 남양주군 광릉옆 조계종 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서 김월운 스님의 주례로 조촐하게 열린 조용필·박지숙의 결혼식에는 보도진등 10여명만이 참석, 화제의 현장을 지켜봤다. 슈퍼스타의 결혼식에는 기이하게도 흔히 있음직한 팬들의 함성도, 웨딩드레스도 , 웨딩마치도, 신부를 부축하고 들어가는 사람도 없었다. 웨딩드레스 대신으로 조용필은 검은 양복에 검은 타이를, 박지숙은 쥐색 투피스를 입은 수수한 모습이었고 결혼선물도 조용필은 신부 박지숙에게 동그란 테에 1푼 다이어몬드가 박힌 반지를, 박지숙은 조용필에게 흰 바탕에 검은색 줄이 있는 시티즌시계를 선물했다. 몇 번을 엎치락 뒤치락 하던 그의 결혼이 맨처음 보도진에게 통보된 것은 거식 하루 전날인 29 일 저녁. 두 번의 결혼계획이 모두 사전 보도된 탓인지 통보 자체도 전혀 구체성울 띠지 않는 것이었다. 하여튼 보도진 7명과 합류, 서울을 출발하기에 앞서 조용필은 전날 朴양집으로 차를 보내 그녀 를 태우고 나오도록 했다. 전날밤 결혼을 결심한 후 "내일 차를 보낼테니 정장을 하고 나오도 록"미리 약속을 해 놓았던 것. 일행은 호사가나 팬들이 따라 잡지 못하도록 차를 바꿔탄 후 서울 외곽을 돌아 낮12시쯤 식장으 로 예약된 경기도 남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작 식이 시작된 것은 예정시간을 넘긴 1시 30분쯤이었다. 주례를 서기로 했던 원운스 님이 의정부에 출타했다가 갑자기 눈이 내려 귀사가 늦어졌기 때문. 예식은 대웅전 법당에서 ①개식선언 ②주례등단 ③신랑신부 입장 ④상견례 ⑤서약 ⑥성혼선언 ⑦예물교환 ⑧신랑신부 인사 ⑨신랑신부 퇴장 ⑩폐회선언순으로 여느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2시 까지 30분간 진행됐다. 이날 결혼식에는 보도진등 10명외에 세사람의 스님이 참석했는데 주례인 월운스님외에 목탁을 친 진현스님, 준비를 맡았던 이 절의 총무스님인 송광스님이었다. 결혼식이 거행되는 동안 두사람은 침착한 모습으로 합장을 한채 좌불을 바라보기도 했으며 "상 대를 사랑과 이해로 감쌀수 있겠느냐?"고 주례가 물을때는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 확신에 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두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봉선사는 의정부에서 퇴계원으로 23Km, 교문 리에서 의정부 쪽으로 12Km상에 위치했으며 옆에 광릉을 끼고 있는 고찰. 식을 마친 일행은 절에서 마련한 간단한 식사로 요기를 했다. 이어 주례 김월운스님이 '군자지도 조단호부(君子之道 造端乎婦)'라는 자필 글귀가 써진 결혼증 명서를 건네주자 두사람은 벌떡 일어나 가지런히 두손을 모으고 군자의 도리는 부부의 조화를 이루는데 있다는 글귀 해석에 귀를 모으기도 했으며 절을 떠나면서 20만원의 시주를 하기도 했 다. 조용필은 결혼소감으로 "어렵게 이룩한 결혼인 만큼 좋은 부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짧 게 코멘트 했고, 신부 박지숙은 "조용필씨가 가진 재능과 뜻을 유감없이 펼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내조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초 이 두사람은 이날 참석한 하객들이 마련해놓은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허니문을 즐길 계획 이었으나 결혼소문이 번져 물밀 듯 밀어닥치는 보도진들을 피하기위해 신부가 공주로 소개되는 바람에 허니문은 '다음기회'로 미루어진 채 취소됐다. 이들은 서울로 출발하기적전 결혼생활의 시작시기는 조용필이 프랑스와 일본공연을 마치고 돌아 오는 4월쯤 조용필의 아파트에서 시작될것이러고 밝히고 "자녀는 하나만 낳기로 합의했다"고 덧 붙였다. 그러나 마치 연습이나 해놓은듯한 이같은 일련의 절차를 행하면서도 그는 언뜻 언뜻 비치는 어 떤 회한같은 것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일생에 한번있는, 그래서 "축복과 사랑으로 여울져야할 결혼이 왜 이처럼 비밀스럽게 해야 하느 냐고?"하는 문제에 대해 상당히 고뇌를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연로한 부모와 그가 가수로서의 오늘날이 있게해준 음악관계자들이 많은데 이 들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듯했다. 실제 그는 기자와 단둘이 만난자리에서 이같 은 고뇌를 털어놨다. "지금의 처지로봐서 (집안의 반대를 지적한 듯) 도시 양가가 전부 참석한 가운데 식을 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렇다고 나 하나만 믿고 망부석처럼 8년을 살아온 신부 박지숙의 가슴을 더 이 상 아프게 할 수도 없어 오늘과 같은 '비상수단'을 택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사실 지난 2월 24일 '결혼식 1년 유예'를 처가에 설득할 당시에는 법률상 부부로서 하자가 없는 혼인신고를 해두는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이날의 예식은 다른 신혼부부와는 달리 이들에게 의 예식은 예식이상의 의미가 다소 엷기도 했다. "나의 결혼을 둘러싸고 너무도 진폭이 큰 물의가 계속됐기 때문에 미루다가 보면 또 무슨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내킨 김에 서두른걸로 이해해달라"고 예식참관자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그 동안의 번복과 연기가 "결혼이 인기에 타격을 준다"는 일반적인 추측과는 상관없었으며 단지 좀더 자유로운 활동을 원했기 때문에 잡음이 일어났다고 했다. 가족과 팬들의 반응 딸 박지숙양의 결혼식이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산사에서 치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어머니 김 옥희(58)씨는 "아직 딸이 결혼식을 했다고만 말할뿐 정확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 경위를 파악하 지 못하고 있다"며 "아무리 대중을 상대하는 가수라해도 결혼식을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처음에 는 서운했지만 지금은 이해할수 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털어놓았다. 또 조용필의 집에서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인 듯 여동생 조종순(30)씨는 연방 걸려오는 문의전 화에 대답할말이 없다며 "단지 오빠가 한일이면 그대로 따를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집안의 분위 기"라고 전했다. 한편 자기회사에 소속된 가수가 회사대표인 자기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결혼식을 올린 사실을 뒤 늦게 안 '해선'대표겸 趙군의 매니저인 유재학씨는 "매니저인 자신도 모르게 기습적으로 치른 것이 섭섭하기는 하지만 조용필의 집안의 반대등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로 이해한다"고 덧 붙였다. 청소년팬들의 경우 "용필씨가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느냐?" "하더라도 왜 떳떳이 못했느냐?"는 것 이 대부분이었고 성인팬들의 경우 "결혼에는 무언가 타인들이 이해못할 사정이나 애로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조용필 파리서 특파원과 단독회견 신혼설계는 귀국뒤에 양가 어른과 상의해서 1984-3-18 주간경향 ◎ "미국가서 선물준비..." 지난 3일 프랑스 외무성 초청으로 코미디언 이주일과 함께 프랑스에 온 조용필. 미국에 떠나기 에 앞서 9일하오 파리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지친 기색이 없이 활발한 모습이 었다. 그와의 일문일답. - 앞으로 일정은 어떻게 되는가? ☞ 9일 부모형제들이 이민가서 살고있는 (부모님은 한국에 1년이면 6개월 정도 거주한다고 함) 미국 뉴저지주로 떠날 계획이다. 당초 파리에서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미국을 경유하기로 스케쥴을 바꾸었다. - 결혼문제로 말이 많아 괴로웠을텐데, 지금의 심정은 어떤지? 앞으로의 신혼설계나 가정 생활 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 그동안 개인문제로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우선 나를 아껴준 팬들에게 사과 드리고 싶고 앞으로 결혼생활설계도 귀국후에 양가 어른들과 상의할 생각이다. 결혼식 다음날 떠나왔기 때문에 신혼설계 같은 것은 생각못할정도로 일정에 쫓겼다. 심지어 해외에 나와있는 동안에 방 영될 TV녹화와 녹음으로 결혼식 당일은 물론 그 이튿날 비행기를 타기전까지 줄곧 일을 했을 정 도다. 지난 3일부터 9일까지 파리에 머물렀던 조용필은 귀국 예정을 바꾸어 미국으로 떠났다. 떠나기 에 앞서 본사 파리특파원과 만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털어놨다. 앞으로 가정생활은 내가 노래만하는 입장이 아니고 창작도 해야하기 때문에 혼자만 있어야 할 시간도 필요하고 공연활동 등으로 가정을 비우는 경우도 흔해서 보통가정과 달리 어려움이 많을 것같아 염려스럽다. 아무쪼록 가정과 사회활동이 양립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인데 아내의 많은 이해가 필요할 것같다. (조용필은 파리에서도 자신의 결혼이 국내 매스컴에 어떻게 반영됐 는지 국제전화로 서울에 연락해보곤 했다) - 귀국해서 신부에게 줄 선물은 어떤 것으로 마련했나? 자녀는 몇 명이나 둘 계획인가? ☞ 아직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 미국에 가서 아내에게 줄 선물을 골라볼 계획이다. 사 실 나는 지금까지 자주 해외에 나갔다. 누구에게 귀국해도 선물을 사다주는 일이 거의 없다. 심 지어 어머니에게도 흔한 머플러 한번 사다드린적이 없을 정도다. - 유럽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1주일동안 파리를 보고 느낀 인상은? ☞ 성당과 박물관이 많고 옛 건물 등이 잘 보존되어있는 것이 퍽 인상적이고 부러웠다. 도시전 체가 나무와 돌조각으로된 느낌을 받고 신비감마저 들었다. 1주일쯤 지나니 강력한 인상이 많이 가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파리가 아름답고 인상적인 도시라는데는 변함이 없다. - 연예인의 입장에서 프랑스 가요계나 방송국 등을 둘러보고 참고가 많이 되었는지? ☞ 이곳의 유명가수들의 카세트를 십여개 샀다. 그동안 듣고 본 것을 참고해 공부를 할 계획인 데 의외로 동양과 비슷한 것같은 인상을 받았다. 디지틀 녹음방식 디스크 조용필 제 6집앨범 나와 1984-02-14 국내 최초의 디지틀 녹음방식의 디스크가 나왔다. 지구레코드가 CBS 소니 스튜디오에 의뢰, 7백 만엔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조용필의 제6집 앨범이 바로 그것 . 디지틀 녹음은 직접 자기테이프에 기록하는 현재의 아날로그방식과는 달리 음향을 일단 컴퓨터 등에서 사용하는 부호를 바꾸어 녹음재생하는 방식으로 잡음이나 음의 파형등 음질상의 기술적 문제를 해소한 것이 특징. 이 레코드는 백영호 손석우 이봉조 이범희등 5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10여명의 작곡가들의 다양한 면모를 선보이고 있다. 음악저작권법 고쳐야한다 1984-02-10 경향신문 저작권법의 음악관계조항을 현실적으로 개정해야한다는 여론이 다시 일고 있다. 작사, 작곡등 창작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대중문화의 발전을 목적으로 지난 57년 공포된 저작권법은 그동안 한번도 손질을 하지않은채 26년이 지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다. 또 한국은 아직도 국제저작권기구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요의 경우 국제시장에서 심한 손 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이때문에 최근 일본등에서 우리가요가 레코드, 카세트등으로 대량취입 돼 판매되거나 반주음악으로 유흥업소에서도 인기리에 애창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음악저작권을 주장할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슈퍼스타 조용필이 지난1월 일본5개도시 순회공연을 빅히트시켰던 그의 인기송「돌아와요부산항 에」는 일본의 정상급 가수를 포함해 30여명이 경쟁적으로 취입, 현재까지 3백50여만장의 판매 고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이 일본에서 많은가수들이 다투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한 것은 한국이 국제저작권 기구에 가입하지않은 상태여서 저작권료의 부담이 없기 때문으로도 지적되고 있다. 일본의 아사히(조일)신문등 현지매스컴들도 「이 노래의 작곡가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할 의무가 없는것을 기회로 많은가수들이 무분별하게 취입하는 것은 반성할 문제」라고 일본가요계의 풍토 를 꼬집었었다. 음악저작권관계법이 철저하게 시행되고있는 일본은 레코드나 카세트 한장에 일화 8원의 인세가 붙으며 방송사용료는 4원, 악보출판권에는 2원40전이 붙는다. 따라서 3백50만장이 팔린 「돌아 와요....」의 음반에대한 인세는 2천8백만엔(한화 8천4백만원 상당)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도 이 노래의 작곡가 황선우씨는 이에대한 저작권료를 주장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최근 일본음악저작권협회와 이 노래 음반제작사의 하나인 CBS소니는 체면치레로 약간의 사례금 을 황씨에게 제공하겠다는 뜻을 비친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상태에서 최근 일본음악저작권협회는 지난81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동안 일본에서 가 수 이성애가 히트시킨「가슴아프게」 (정두수작사 박춘석작곡)를 비롯,「비내리는 호남선」「물 방아도는내력」등 한국가요는 19곡으로 일본의 14개 프러덕션이 취입판매했다고 밝히고 레코드 와 카세트로 모두24만9천장이 팔렸다고 통보,한국과 음악저작권 관계교류를 하자고 제의해 왔 다. 지금까지도 일본노래의 한국상륙이 철저히 봉쇄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대중가요작곡 가 중 손목인 길옥윤 손석우 서영은씨 등은 일본음악 저작권협회 신탁회원으로 등록돼 작품관리 를 하고 있으며 가수 조용필도 지난해6월 같은 케이스로 일본저작권협회에 가입됐다. 이밖에 원 로 작곡가 고봉산씨가 지난 81년4월 일본의 도무프러덕션과 계약, 신곡17곡을 일본에서 발표해 200만엔상당의 인세를 받았었다. 이와같이 최근 우리가요가 일본등에까지 시장을 넓혀가고 있으나 작곡가들이 응분의 권익보호를 받지못하는 것은 우리 저작권법이 현실에 맞지않기 때문인 것으로 지적되고있다. 따라서 당국은 현실에 맞도록 관계법을 고쳐야 할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한국음악 저작권협회는 법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갖기도 했으며 여러차례 관계당국에 개 정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아직껏 법손질에 대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는 상태다. 가수 조용필 27일 결혼 1984-02-08 가수 조용필군(34)이 오는 27일 낮 12시 서울 영동 목화 예식장에서 중학교 무용교사인 약혼녀 박지숙양과 결혼식을 올린다고 신부측에서 알려졌다. 신부 박양은 전 신민당의원인 박모씨의 3 녀. 일본 5대도시 리사이틀 조용필 1984-02-01 경향신문 한국의 톱가수 조용필(34). 이제 아시아 가요계를 휩쓴 슈퍼스타로 우뚝섰다. 그는 지난달 30일 일본 요꼬하마(횡빈)를 끝으로 동경, 명고옥, 대판, 복강 등 일본의 5대도시 를 순회하며 6차례의 리사이틀을 갖는동안 10대에서부터 70대노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일 본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것이다. 「처음엔 걱정도 되었읍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가수들이 일본에서 여러차례 공연을 했었지만 청 중이 대부분 재일교포들이었는데 이번 저의 공연은 일본인 프러모터가 주최한 것이어서 과연 어 느만큼 좌석을 메워줄지 걱정이 됐었읍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많은 일본팬들이 입장했고 특히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몇차례나 앙코르를 요청해 무척 기뻤읍니다.」 7일동안 5개 도시를 도는 강행군으로 약간 수척해지긴 했지만 얼굴 가득찬 기쁨을 감추지못했 다. 공연장을 꽉메운 대부분의 일본팬들이 26곡의 레퍼터리가 끝난 다음에도 자리를 뜨지않고 재창 3창을 요청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는 등 광적일 정도의 열기를 터뜨린 것이 무엇보다도 큰 성공이라고 몇번씩이나 감격해했다. 「청중들이 가사도 제대로 모르면서도 열광해준 것은 내 노래의 멜러디에서 공감대를 찾았기 때 문인것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한 그는 순수한 우리가요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에 뿌 듯한 긍지를 느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교포가 많이 사는 일본에서 조용필이 이처럼 성공한 것은 천재기사 조치훈 9단이 일본바둑계를 석권한 것 만큼이나 「한국인」을 과시한 것이어서 더욱 의의가 크다. 이번 일본공연의 성공을 발판으로 오는7월 일본의 뉴뮤직 스타 다니무라 신지, 홍콩의 톱가수 알란탐등과 함께 동경의 고라꾸엔(후락원) 야구장, 오오사까의 야외 경기장, 그리고 서울, 홍콩 등 3개국 순회공연을 쇼프러모터인 교오또 도오꾜로부터 요청받고 있는 그는 「이번 일본공연은 1인 무대였지만 오는7월의 공연은 3개국 합동경연의 성격을 띠어 우리가요를 자랑할 수 있는 좋 은 무대가 될 것」이라며 이 기회에 한국가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겠단다. 「그동안 우리나라 가수들이 홍콩등 동남아에서도 많은 공연을 했지만 큰 반응은 얻지못했으나 앞으로는 동남아쪽에서 더넓은 무대를 개척하겠다」고 세계무대로 뻗어나갈 꿈을 펼쳤다. 한편 조용필의 전속에코드사인 지구와 라이선스 계약을 하고 지난 82년10월「미워 미워 미워」 「돌아와요 부산항에」등 그의 노래를 취입, 1백만장의 판매기록을 세운 일본의 CBS소니사는 조 용필의 노래 4-5곡을 중국 광동어로 취입, 홍콩 공연에 앞서 현지에서 판매할 계획인것으로 알 려졌다. 이번공연의 개런티는 매회1만달러(항공료 체재비제외)를 받았는데 이 수준은 일본의 일급가수보 다는 높고 홀리오 이글레시아스등 세계적 톱스타보다는 낮은것. 조용필의 일본공연을 주최한 일본인 쇼프러모터인 교오또 도오꾜는 예상외의 성황에 놀란표정이 며 조일신문등 현지 매스컴도 그의 열창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주었다. 「조용필은 일본의 엔까(연가)인 트로트풍의 노래와 팝송, 민요등 모든장르의 노래도 훌륭하게 소화하는 만능 가수로 아시아의 톱싱어로 손색이없다」「일본 가수들의 가창력에 비해 음폭이 넓고 깊숙이 배속에서 우러나오는 탁월한 가창력이 일품」이라고 격찬한것. 일본의 권위있는 가요평론가인 사또 구니오(좌등방부)씨는「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으며 아시아의 자랑스런 가수로 꼽을 만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또 지난해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엔까가수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 싱글판을 50만장이상 판매한 아쓰미 지로도 「만약 조용필이 이곳에 상주하면서 가요활동을 하 면 일본가수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계 하기도했다. 조용필은 일본에서의 폭발적 인기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기위해 현지 프러덕션을 설립하는 문제등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한 준비를 끝낸다음 오는 3일경 귀국할 예정이다. 조용필노래 "마음이 있고 호소력 풍부" 日 전문가들, 일본서의 폭발적인 인기 분석 1984년 1월 23일 중앙일보 조용필의 노래, 그중에서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일본에서 날이 갈수록 인기를 모으고 있 다. 일본 샐러리맨들은 퇴근길에 산토리 위스키 몇잔 마시고 가라오케(반주만 들어있는 카세트 테이 프)에 맞추어 노래 몇곡 부르는 것이 풍습처럼 돼있다. 그 샐러리맨사회에서 요즘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못부르는 사람은 「노래 부를줄 아는 사 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것도 1절은 원어(한국말)로, 2절은 일본말로 부를 수 있어야 어깨 를 편다. 술좌석 대화에서도 조가 언제 일본공연을 갖는다는 정도는 미리 알고 있어야 얘기가 통한다. 조용필이 22일 동경의 NHK 홀에서 가지 두차례의 공연은 4천여객석이 초만원을 이루었으며 표를 못 산 팬들의 문의 전화가 많아 주최측인 CBS소니가 즐거운 비명을 올렸다. 일본 TV , 후지 TV, TBS 등 민간방송들이 매주 실시하는 인기가요 베스트텐에는 으례『돌아와요 부산항에』가 5∼6위를 차지하고 있다. 조용필의 노래가 인기를 모으자 일본가수와 레코드회사들이 다투어 그의 노래를 취입, 그동안 13개 레코드회사에서「부산항」판이 나왔으며 7명의 일본남녀가수가 동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 다. 이처럼 일본에서 조용필붐이 일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일부에서는 프러모터인 CBS소니의 PR 작전 때문이라고 차가운 눈으로 보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의 가수로서의 기량이 뛰어난데다 일본에 좋은가수가 없다는 점, 그리고 나아가 외국의 노래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자세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점등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일본예술대학의 「고시마·요시꼬」(小島美子)교수는 조용필의 노래 에 마음(心)이 있고 전달의 기술과 호소력을 갖고있다고 평하면서 현재 일본에는 趙와 같은타입 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가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무슨노래든 소화할수 있다는 점에서는 「미소라·히바리」가 비슷할지 모르나 「미소라」는 스스로 노래를 만들거나 편곡할수 없다는 점에서 조용필을 따르지 못하며 감각이 전체적으로 이 미 낡았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趙의 노래가 최근에 와서야 빛을 보게된데는 일본인들의 심리저변에 깔려있는 차별의 식이 적지 않게 작용했으며 제동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가 일본에 처음왔을때만해도 李成愛같은 여자와는 달라 은근히 냉대 받았다. 관계자들 사이 에서도 적극적으로 취급하려는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趙가 일본노래를 부르면서 거기에 자신의 노래를 섞어가며 접근한 것이 주효, 모든사람들이 마음을 열어 환영하게 된것』이라는 설명이다. 「고시마」교수는 또 과거 歐美음악에 기울였던 세계음악의 조류가 최근에는 각기 자기 민족의 고유음악에 눈을 돌리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 이런 경향이 자기 노래와 공통점이 많은 이웃나라 의 노래를 받아들일 소지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日本 演歌인 『北國의 春』이 최근 中共을 비롯, 東南亞각국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것도 이같 은 추세를 반영한것이며 歐美 노래가 아닌 아시아인의 노래가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교류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경향이라고 「고시마」교수는 강조했다. 『부산항이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창구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 러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는 일본인들은 가사의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을것』이라고 「 고시마」교수는 분석했다. 『일본인의 마음과 演歌』를 펴낸 「니시자와· 소」(日本作詞家協會 副會長)씨도 대부분의 일 본인들이 가사내용을 모르고 부르고 있다고 했다. 「니시자와」씨는 일본 演歌의 특징이 감상적이라는 점을 들고 조용필의 노래가 이같은 일본인 들의 감상 취향을 사로잡고 있다는 의견을 폈다. 『2차대전 전에는 「아리랑」이 크게 유행했고 전후에는 이성애의 「가슴아프게」가, 그리고 지 금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노래들이 모두 감상적이라는 점에서 공통 점이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83 KBS 가요대상·83 MBC 10대 가수 1984년 1월 한해의 가요계를 결산하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KBS 방송가요대상」, 「MBC 10대 가 수상 가요제」이다. 매년 연말이면 실시 되어온 양대 방송국의 행사가 예년과 같이 뜨거운 열기가 없었던 느낌이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조용필의 아성에 도전할 가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만큼 가요계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고, 그러다 보니 기존 인기 가수들이나 신인 가수들이 활발한 활동 을 보이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83 KBS 방송가요대상 시상식」은 지난 12월 30일 잠실실내 체육관에서 가졌다. 남자 가수 부 문 최고 인기상에 조용필. 조용필은 연 3회 연속 최고 인기가수상을 받았다. 또한 여자부문 최 고  인기 가수상은 윤시내. 2회연속 PD 인기상도 받아 2관왕이 되었다. 남자 신인부문은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정광태. 여자신인부문은 <아! 대한민국>을 부른 정수 라 그리고 로크부문은 송골매, 중창부문은 한울타리가 각각 받았다. 또한 「'83 MBC 10대 가수상 가요제」는 12월 31일 문화체육관에서 가졌다. 가수왕은 조용필, 지난해 이용에게 뺏겼던 가수왕을 탈취한 셈이 되었다. 최고 인기상도 받아 명실공히 지난해 최 고인기를 얻었다는 결론이다. 신인부문은 이동기, 정수라가 각각 수상했다. 지난해 「MBC 10대 가수상 가요제」에서 예상을 빗나 이용이 가수왕을 차지해 의외성을 빗기도 했는데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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