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997/6/2] 조용필은 누구인가-80년대 `가요'시대 주역…`국민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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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6-14 15:00:09 조회수 5607
[나를 키운 공간-4] 조용필은 누구인가-80년대 `가요'시대 주역…`국민가수' 1997-06-02 조선일보 조용필(47)은 한 인터뷰에서 "음악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몸 속 에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조용필 음악사는 경 동고를 졸업한 68년 가출로부터 기록된다. 중학교 때부터 '벤처스'와 '비틀스' 음악에 심취한 그는 "딴따라는 안된다는 아버지 반대에 선 택 여지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오랜 무명 딱지를 떼지만 이 듬해 연예계 대마초 파동으로 좌절을 맛본다. '조용필 시대'는 해금된 80년초 드라마 주제가 '창밖의 여자'로 화 려하게 열렸다. 이후 그는 '촛불'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큐' '허공' '친구여' '미지의 세계' '꿈' '한오백년' 등 수많 은 히트곡을 쏟아냈다. 조용필의 등장은 80년대 우리 사회-문화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팝송이 주도하던 대중음악 시장 헤게모니가 가요로 넘어왔다. '오빠부 대'의 원조이자, 가요 사상 첫 밀리언셀러를 탄생시 켰다. 그를 위해 '국민가수'라는 찬사가 만들어졌다. 젊은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는 최근 한 글에서 조용필을 가리켜 "주류 대중음악의 단 한명 영 웅" "한국 주류 대중음악사의 살아있는 신 화와 역사"라고 극찬했다. 내년으로 음악인생 30년을 맞는 조용필은 요즘 '또 하나 신화'를 만 들고있다. 지난 5월에 낸 16집 '바람의 노래'가 커다란 인기를 얻으며 한달도안돼 20만개 넘어 팔렸다. 코흘리개들의 댄 스음반 수요에 좌지우 지돼왔던 업계에선 "50만개도 어렵지 않겠다"며 놀라고 있다. 조용필의 부산 광복동 '부산의 명동' 광복동이 일제 때 일본인들이 몰려 살던 중심지였다 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행정 구역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후 일본인 이 가장 많이 살던 곳에서 나라 되찾은 기쁨을 기리겠 다는 뜻에서 붙 인 이름이다. 법정동으로는 광복동 1∼3가에 이르는 길이 1㎞가량 도로를 중심으 로 한좁은 지역이다. 하지만 행정동으로는 용두산공원을 가운데 두고 신창동 창선동 동광동 일부를 감싸안는 도심 지역을 일 컫는다. 70년대 조총련계 재일동포 고향 방문이 부산항을 거쳐 이뤄졌듯 부 산은 일본을 드나드는 목이 다. 1910년 일본 강점 이후 용두산 주변 일 대는 일본 단독조계지가 됐다. 당시 광복동 지명은 '나가테 도오리'.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긴 거리'쯤이다. 광복동은 이미 이때부터 영남 최고 번화가로 자리잡았다. '쇼와칸' '아요이칸' '부민관' 같은 영화관을 비롯해 가게와 술집이 줄지어 들 어섰다. 전차가 끊기는 밤이면 길을 따라 온갖 먹거 리와 방물좌판들이 즐비한 별천지 야시장이 펼쳐졌다. 광복동은 8·15를 맞은 뒤 더욱 번창했다. 일본어 간판들을 떼어낸 자리에 우리말 간판이 걸렸 다. 일본인들 텃세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사람들이 다투어 크고 작은 상점을 열었다. 한국전쟁때 광복동은 피난민의 오아시스였다. 각지에서 몸을 피해 온 문화예술인들이 광복동 주 점거리에서 시름의 밤을 달랬다. 용두산 기슭에 판자촌을 이룬 피난민들은 광복동 발치 국제시 장에서 행상을 하거나 품 팔며 고향 돌아갈 날을 손꼽았다. 그후 광복동 풍경은 경제발전과 시류에 따라 크게 바뀌었다. 80년 대 중반부터 재건축 붐을 타 고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용두산 공원반경 2백m 안팎 정방형 지역은 여전히 부산 상권 1번지이자, 부산 젊은이들의 메카다. "젊은 열기 넘쳐났던 음악도시" 광복동은 젊은 시절, 내 정신적 고향이다. 부산 광복동과 첫 연을 맺 은 것은 71년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드럼치던 김대환씨, '사랑과 평화' 최이철씨와 함께 그룹 '김트리오'로 활동했다. 후 에 최이철씨 대신 친구 이남이씨가 들어왔다. 서울 소공동 국제호텔 디스코클럽을 주무대로 활동하던 어느날 팀 맏 형 김대환씨가 석달 계약 에 부산 일을 하자고 제의했다. 광복동 동아데 파트 3층 나이트클럽이었다. 김씨는 "부산에서 제일 큰 클럽이고 조건도 좋으니 연습삼아 가자"고 했다. 부산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 고고 붐이 불붙고 있었다. '부산의 명동' 광복동엔 크고 작은 고고 클럽들이 다투어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 밴드는 서울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멤버가 쟁쟁해 서울서도 잘나가던 우리는 A급 대우를 받았다. 내가 부산에 가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때 문에 나를 부산 출신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내 고향은 경기 도 화성이다. 아버지가 염전사업을 해 어려서부 터 바다와 친숙한 나는 바다를 볼수 있는 항구도시에 푹 빠졌다. 광복동에 대한 첫 인상은 '젊음' 그 자체였다. 밤마다 거리에 넘쳐나 는 젊은이들 열기는 스물 두살 젊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노래를 할 때마다 쏟아지는 환호는 서울 무대보다 더 뜨거웠다. 각박한 서울 사 람들과 달리 인심 좋고 순수했다. 우리는 동아데파트 근처에 하숙집을 구해 클럽을 오가며 공연했다. 당시광복동 뒷골목엔 싸고 허름한 음식점이 많았다. 끼니는 할머니가 수 십년째 주방을 지키는 식당에서 주로 해결했다. 명동순두부처럼 조개 넣 고 맵게끓인 순두부와 된장찌개는 지금도 생 각하면 군침이 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술도 잘 못마셨다. 그저 음악밖에 몰랐다. 매일 낮 에도 클럽 텅빈 무대에서 노래와 기타를 연습했다. 동아데파트 옆 건물 팝음악 감상실 '아카데미음악실'은 내 아지트였 다. 아침이나 낮시간 혼 자 몇시간씩 틀어박혀 최신 팝송을 듣곤 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탄생한 것도 이 즈음이다. 황선우씨가 작사- 작곡한 이 곡은 원래 나와 이남이씨 둘이 통기타로 반주한 포크송이다. 그걸 75년 앨범에 흥겨운 리듬으로 편곡해 넣었다. 구색 맞추는 기분으 로 넣은 노래가 내 운명 을 바꿀 줄 누가 알았을까.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빅히트한 76년까지 매년 몇달씩 부산 밤무대 에서 공연했다. 그때마다 광복동은 첫 정을 준 애인처럼 친근했다. 아픈 추억도 있다. 대마초사건으로 무대를 뺏긴 78년 여름 광복동 한 클럽에 몰래 출연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른 업소 주인이 고발하는 바람에 도망 치듯 보름만에 부산을 떠나야 했다. 광복동을 다시 둘러본 건 7년 만이다. 눈에 익은 옛 건물 대신 산뜻 한 새 빌딩들이 들어서서 거리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동아데파트엔 클 럽대신소극장 간판이 걸렸다. 그래도 골목마다 떠 오르는 추억들이 새록 새록하다. 칠순 넘은 양어머니가 운영하던 창선파출소 근처 금은방 선광당 자리 엔 피자 집이 들어섰다. 마지막 찾아뵈었을 때 건강이 나쁘시다더니 연 락끊긴 양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만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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