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은 우리 대중음악계에 다양성의 시대를 열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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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4-05-28 18:02:20 조회수 6733
▲ 조용필은 우리 대중음악계에 다양성의 시대를 열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민 가수 조용필 “음악은 그 시대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철학박사       가수 조용필 씨가 이란 제목으로 5월 1일 서울에서 시작해서 전국을 순회하는 두 달간의 공연을 갖는다. 매년 주제를 달리하면서 앞으로 5년에 걸쳐 공연을 하고, 5년 후에는 자신의 노래들로 뮤지컬 한 편을 만들 구상도 갖고 있다고 한다. 노래인생의 시발점인 1968년부터 40년에 이르는 시점에서 뜻깊은 중간결산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예술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유지되고 지속하는 것이라 할 때, 조용필 씨만큼 다양한 연령층과 부류의 대중들로부터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 뮤지션이 있을까.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를 역삼동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났다. ---------------------------------------------------------------------- 우선 이번 공연의 제목으로 내건 을 구상하게 된 동기와 올해 주제는 어떤 것인지 물어보았다.“1년에 공연을 40회 정도 하는데, 이번에는 컨셉트가 있는 공연을 통해 공연에 의미를 부여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습니다. 언제까지 할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여행’입니다. 삶의 여행이라는 의미도 있고, 그냥 편하게 길을 떠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이 경제적겵ㅔ÷?혼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혼란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같은 히트곡과 80년대 팝송 등 밝은 노래를 위주로 공연을 할 예정입니다.” 이번 공연의 제목에 등장하는 ‘Feel’은 열기(fever) ·즐거움(enjoy) ·에너지(energy) ·잎섬(lead)과 같은 의미들의 조합이라 한다. 특히 공연의 형식과 내용에서도 앞서고 리드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도 항상 새로운 음악을 해보겠다는 의미지요. 보다 큰 구상으로는 저의 전곡을 사용한 일종의 뮤지컬 같은 것을 제작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조용필. 이 작은 체구의 거인이 음악에 관심을 갖고 음악인생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렸을 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집에 유성기가 있었고, 또 당시(1960년대)만 해도 팝송 천국이어서 대중문화의 대부분이 팝송이었지요. 기타 연주를 듣고 기타를 접하게 되었고, 하모니카를 참 잘 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순수하게 음악이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의 반대는 물론 무척 심했지요.” 이렇게 어렵게 음악을 시작한 것이 68? 고단한 무명의 시절을 보낸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6년 히트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의 애청곡이자 애창곡인 이 곡의 탄생배경은 무엇일까. 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까. “70년대 중반 당시 국민의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리듬과 멜로디가 사람들의 감성에 파고들 수 있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운 내 사랑’으로 되어있던 가사를 ‘그리운 내 형제’로 바꿈으로써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대감으로 갔다는 점도 성공의 이유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 그룹사운드로 대중가요를 편성했다는 점이 사람들에게 더 강한 호소력을 갖게 했고, 대학가에서 해수욕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됐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원래 이 곡은 72년에 지방 음반사에서 통기타 반주용으로 취입한 것을 76년에 그룹사운드용으로 재취입한 것이라 한다).” 활동금지 중 피 토하며 얻어낸 새 목소리 50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출생한 조용필은 68년에 그룹사운드로 음악을 시작한 후,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 밖의 여자’,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무수한 히트곡들을 통해 가장 다양한 연령층과 부류의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로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80년대에는 방송사 최우수 가수상을 휩쓸었고, 90년대에는 ‘건국 이후 최고 가수’, ‘정부수립 50년 최고의 스타’, ‘ 20세기 최고가수’라는 호칭을 들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공연을 했고, 지금까지 6년에 걸쳐 그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통해 신인가수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대마초 가수라는 굴레로 활동금지를 받았던 것이다. 그 시기에 목소리를 만드는 노력을 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기에 오늘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을 건네 보았다. “가수로서의 절정기는 아니었고, 신인가수 시절이었지요. 제 목소리가 원래는 미성입니다. 그런데 미성으로는 흑인 음악이나 록 음악을 하기가 힘이 들어요. 그래서 허스키한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바꾸는 훈련을 했습니다. 창을 하시는 분들도 원래는 걸쭉한 목소리가 아닌데 훈련을 통해 그렇게 만든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당시 판소리를 하시는 분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었기에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고) 그분들과 교류하면서 스스로 터득했지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기침이 많이 나오고 구역질이 나기도 했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음역을 넓히게 됐습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시련기에 새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새롭게 탄생시킨 노력이 있었기에 80년대에 가요계에서 누릴 수 있는 그만의 전성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창 밖의 여자’가 ‘조용필의 80년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우연히 종로를 걸으면서 그 노래를 듣고 온몸에 전율을 느꼈던 필자의 기억을 말해 보았다. “음악은 그 시대의 역사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 말 ·80년대는 슬픈 시대였습니다. 10?6이 있었고, 새로운 군사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 시대였기에 사람들이 슬픔에 찬 호소력 같은 것을 찾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대중음악은 항상 대중들의 정서와 같이 가는 것이니까요. 그 외에도 청소년들이 좋아했던 ‘단발머리’, ‘고추잠자리’, ‘못찾겠다 꾀꼬리’와 같은 곡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30세였고 청소년들의 인기 대상은 아니었는데, 제 음악이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대상이 되었지요.” 가수의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예술이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음악으로 자신을 보여줬던 가수 조용필만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 후 나온 ‘한오백년’에서는 조용필이 득음(得音)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았다. “(‘득음’이라는 표현에 그저 웃으면서) 우리 민요를 리메이크한 곡이었는데, 계산해서 부른 노래는 아닙니다. 우연히 TV를 보는데, 강에서 삿갓 쓴 사공이 조그만 배의 노를 저어가는 화면을 배경으로 ‘한오백년’의 노래가 나오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양악으로 접목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시도하게 됐습니다. 그것이 어느 공연에서 큰 호응을 얻으면서 앨범에 수록하게 된 것입니다.” ‘한오백년’이 받았던 호응은 노래의 이면에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인 한(恨)이 스며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한에 관한 그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한은 슬픔일 수도 있고, 기쁨일 수도 있으며, 눈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예술로 승화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80년대 초와 중반도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것들이 바뀌던 시기였습니다. 통금이 해제되고, 컬러TV가 나왔으며, 음악에서는 모노에서 스테레오로 전환되던 때였습니다.” 정치적인 암울함에서 가졌던 슬픔, 시대의 변화에서 사람들이 갈구한 기쁨과 같은 것이 그의 노래 속 정서인 한과 일치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들린다. “‘일편단심 민들레야’ 같은 곡은 월북한 동아일보 기자 부인이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남편을 그리워하는 글을 가지고 곡을 만든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슬픔과 같은 것이 바탕에 깔려 있지요. 그렇지만 저는 음악이 만들어진 계기야 어떻든 음악이 나오면 대중들의 것이 되며, 대중들의 해석에 따라 보여지고 대중들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가요도 해외 진출 가능성 커” 조용필의 노래는 내용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의의를 갖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오백년’에서는 서양의 소울과 전통음악의 접목을 시도했다. 그 밖의 많은 시도들을 통해 우리 대중음악계에 다양성의 시대를 열게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거문고 등과 어울리는 스케일을 건반으로 바꾼 것, 즉 5음계를 7음계로 리메이크한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적인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에 잘할 수 있고, 외국음악의 경우도 소울이나 록과 같은 것들은 나름대로 소화가 돼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같이 갖고 있었기에 다양화를 이룰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 어제 오늘 그리고’와 같은 곡들은 록 음악으로 분류된다. 85년 7집 앨범에서부터 그는 이 새로운 록의 장르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 록은 지나치게 서구적인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록은 다양합니다. 미국 록과 영국 록이 다르고, 한국이나 일본?중국은 하기 힘든 음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한국적인 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록이 갖고 있는 저항과 반발이라는 의미가 우리의 한의 정서와 통하는 것은 아닌가 물어보았다. “록의 정신은 저항과 반발이라기보다는 자유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흥겹다는 점입니다. 이론적으로 록을 세분화하고 마치 이론을 위한 음악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즐길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의미만으로 족합니다.” 즐거움을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지나친 의미부여가 즐거움을 주는 음악을 딱딱한 이론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조용필은 라이브 공연 위주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국 순회 그리고 일본의 10대 도시 순회공연도 가진 바 있다. 지난해 8월 ‘데뷔 35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수십년 만의 폭우 속에서도 4만5,000석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올해로 그의 나이 54세. 40년 음악인생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 그가 국제화 시대, 문화경쟁의 시대에 우리 대중음악의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우리의 체험에 비춰 볼 때, 중국영화를 수입해 보았던 시절에서 이제는 우리 영화가 중국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동남아로 향하는 시절이 됐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머지않아 영화의 본고장이라는 할리우드 진출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문화개방이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 일본 노래가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저변에 깔린 일본풍도 많이 있었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한류라고 해서 중국으로, 일본으로, 동남아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시아라는 하나의 권역이 형성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속에서 우리 음악의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지난해 33회 공연에 이어 올해에는 40회, 내년에는 더 많은 공연을 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공연이 아시아 전역을 넘어 세계 무대로 향하게 되는 날을 잠시 생각해 본다. 그것은 아마도 그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문화계의 노력이 있어야 하며, 우리들의 호응과 관심이 변함없이 그와 함께해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출처 - 경제전문 잡지 Forbes Korea http://forbes.joins.com/forbes/program/forbes_article/0,3773,aid%252D204562,0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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